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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성주

대산동북비고택(大山洞北扉故宅)

노촌魯村 2010. 6. 19. 07:36

 

 

 

 대산동북비고택(大山洞北扉故宅.시도민속자료 제44호 (성주군).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21)

사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 이석문이 살던 곳으로,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세자를 그리워하여 조선 영조 50년(1774)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이곳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순조 21년(1821)에 손자 이규진이 안채와 사랑채를 새로 지었으며, 사랑채는 고종 3년(1866)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장판각, 안대문채, 마굿간, 아래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솟을대문이 남아 있어 당시 고관가옥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은 비교적 연대를 믿을 수 있는 건물로 한옥 주택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자료이다. (문화재청 자료)

 대산동 북비 고택의 사랑채는 ㄱ자형 집으로 남쪽으로 돌출한 부분에 통칸으로 긴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 뒤쪽에는 부엌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사랑방과 뒷방을 아래 위 겹으로 배치하여 공간을 구분하였다. 건물의 맨 오른쪽에는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사랑채

사랑채(문화재청 자료 사진) 

 

 

 

 

 

 

 안채

안채(문화재청 자료 사진) 

 북비(北扉 北:북녘, 북쪽 :사립문 문짝 집, 가옥(家屋)) 

한개마을을 빛낸 이석문을 북비공(北扉公)으로 부르는 연유는 '북비'(北扉: 북쪽으로 난 여닫이 외문짝)를 이 집의 택호로 사용한 데에 연유하고 있습니다. 이석문은 영조 15년(1739년)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1762년에 사도세자의 참변을 직접 목격하고 영조에게 잘못이라 간하였으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자 세손을 업고 어전에 나아가 세자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낙향하였습니다. 이석문은 고택에 북쪽으로 문을 내고 세자가 묻힌 북녘을 향해 매일같이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후에 영조가 지난 일을 후회하며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

 

 

대산동 북비고택의 소박한 건물이다. 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졌으며, 원래는 북향집인데 마루 북쪽을 널판벽과 문으로 막아 현재는 남향집으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