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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古代 마을聚落 시지時至 - 국립대구박물관 특별전시 -

노촌魯村 2016. 12. 11. 12:57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古代 마을聚落 시지時至

전시를 열며

대구 시지유적은 수성구 시지동, 노변동, 매호동, 신매동, 욱수동 일대의 광범위한 지역게 걸쳐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형성된 대규모 복합유적입니다. 이 유적의 일부는 1970년대에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나, 이 일대가 택지지구로 개발되면서 1992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일부 지역은 현재도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50여 차례가 넘는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땐석기로부터 조선시대의 도자기와 숟가락에 이르기까지 약 4만 점이 넘는 다양한 문화재가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시지유적 조사는 대규모 토지개발 전 지표조사의 의무적 시행시굴조사 실시라는 우리나라 고고학적 유적조사의 발전과 발굴제도상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유적은 장기간의 발굴조사와 다양한 유구, 통시대적 문화상에도 불구하고 살함들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하였습니다. 화려한 껴묻거리副葬品가 있는 지배계층의 대형고분이나 당시의 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을 대규모 건물터가 조산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주목할 만한 명문자료가 있거나 장식성과 조형미가 돋보이는 금공품이 많지도 않습니다. 시지유적은 평범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대다수를 구성했던 서민들의 모습을 찾아 그 자취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는 시지유적에서 출토된 문화재를 먼저 시대별로 개관한 뒤 유적의 구성과 유구별 출토 문화재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조명해보고자 마련했습니다. 특히 발굴조사 이후 보존처리와 정리작업을 거쳐 보관 중이던 문화재를 최대한 많이 전시품으로 활용해 일반에 공유하고자 수장고 보관형 방식으로 전시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있던 문화재가 발굴조사된 이후 정리와 등록, 연구를 거쳐 전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시지의 옛 모습과 유적 발견

때맞춰 도착한다는 의미의 시지時至라는 지명은 전근대 숙박시설인 이 시지에 있었던 데서 유래합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는 시지의 옛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시지유적의 존재는 1970년에 처음 확인되었고, 1992년에 첫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 선사시대의 시지

시지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삶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시지에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입니다. 경산 옥산동과 옥곡동에서 대규모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여러면 석기多角面圓球 구석기 대구 시지지구생활유적 Ⅰ-5G -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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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간토기 赤色磨硏土器 청동기 대구 매호동 970-4번지유적1호 주거지


덧띠토기 粘土帶土器 청동기 경산옥곡동유적

바리모양 그릇 鉢形土器 청동기 경산 옥산동 300번지 유적

달도끼 環狀石斧 청동기 경상옥곡동유적. 경산옥산동300번지유적.대구시지동공동주택지구간부지유적




가락바퀴 紡錘車 청동기-원삼국 경산옥산동300번지유적. 경산중산동160-1번지생활유적. 대구욱수동유적.대구가천동유적

간돌검 청동기 경산옥곡동유적.대구시지동지석묘군.대구매호동지석묘군.경산옥산동300번지유적.대구내환동분묘군.대구욱수동134번지유적

돌화살촉 石鏃 청동기 대구매호동지석묘군.대구시지동지석묘군.경산옥곡동유적.경산옥산동300번지유적

붉은간토기 赤色磨硏土器 청동기 대구시지동지석묘군. 대구매호동지석묘군

 

. 초기철기 원삼국시대의 시지

대구 욱수동동과 경산 옥산동에서는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와 손잡이 달린 옹把手附甕등 초기철기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대구 가천동에서는 원삼국시대의 널무덤木棺墓이 조사되었습니다.

손잡이 달린 항아리 把手附壺 삼국 경산옥산동300번지유적1호

독널 甕棺 초기철기 대구욱수동103번지유적

 

. 삼국시대 시지의 공방과 번영

대구 욱수동과 경산 옥산동에는 4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40여 기가 넘는 토기가마가 운영되었습니다. 욱수동옥산동 토기가마에서 생산된 토기는 경산 임당동 고분군을 비롯해 멀리는 달성 문양리 고분군에서도 확인됩니다. 5세기 중후반부터는 시지에서 철기도 제작됩니다.


 

. 삼국 통일신라시대의 시지

4세기 중후반 토기가마의 운영을 계기로 시지에는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취락 내에는 수형竪穴유구와 주거지, 도로, 우물 등의 생활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2,000여 기가 넘는 삼국시대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상은 시지가 그만큼 번성하였음을 알려줍니다. 6세기 중반 이후 토기가마가 폐기되면서 시지 취락도 점차 퇴락해 갔습니다.

말모양 그릇 馬形土器 삼국 대구욱수동유적 가지구 1호구

굽다리 바리 臺附盌 삼국 대구욱수동고분군 ⅠB-71

금동관(대구 노변동 고분군 473호 돌덧널무덤)

 

. 고려조선시대의 시지

고려조선시대의 기와 건물지는 경산 옥산동중산동에 많이 분포합니다. 시지에는 고려조선시대의 움무덤土壙墓도 많습니다. 이러한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와 도자기, 숟가락 등은 시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숟가락(대구욱수동 경산옥산동유적 움무덤 등)

통계로 본 시지 유적

* 시지유적 분포 면적 : 약21,500,000평방미터(6,500,000평)

* 발굴조사 참여 기관 : 10개 기관

* 발굴조사 유적 : 55개 유적

    생활유구(주거지 등) : 1.137기

    생산유구(토기가마 등) : 47기

    제사유구 : 44기

* 국가귀속발굴문화재 : 40,362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