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전남

송광사 보조국사비(松廣寺普照國師碑)

노촌魯村 2018. 9. 6. 16:25



 



송광사 보조국사비(松廣寺普照國師碑. 시도유형문화재 제91호)

송광사 절내의 외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보조국사 지눌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지눌은 고려시대의 승려로, 8세에 출가하여 34세에 승과에 합격하였으나, 출세를 멀리하며 선배의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하였는데, 지눌은 교종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선종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일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자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니다 송광사에 들어와 머무르게 되었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선종을 크게 일으켰으며, 희종 6년(1210) 53세의 나이로 입적하니, 왕은 그를 ‘국사’로 추증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밑의 일부가 땅에 묻혀있는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의 머리화 되었으나 사실적이지는 못하다. 머리뒤에는 귀가 솟아 있어 독특하며, 등은 육각무늬들로 가득 차 있는데 조각이 형식적이고 힘이 없다. 등 중앙에는 비몸을 꽂아두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마련해 놓았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을 새기어 장식하였는데, 서로 엉켜 꿈틀거리는 모습에서 생동감이 느껴지기는 하나 조각은 서투르다.
원래 고려 희종 6년(1210)에 처음 세웠던 것을, 조선 숙종 4년(1678)에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전체 높이 394㎝, 비신 높이 253㎝·너비 120㎝.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 이 비는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를 갖춘 전형석인 비석 형태이다. 귀부는 대좌가 땅에 묻혀 보이지 않고 귀갑(龜甲) 윗면만 노출되어 있다.
귀두(龜頭)는 용두(龍頭)처럼 변하여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두 눈은 튀어나와 있다. 다문 입에는 여의주가 없으며 귀두 뒤쪽에 특이하게 두 귀가 솟아나 있다. 목은 짧으며 앞에 비늘이 양각되어 있고, 등에는 귀갑문이 육각으로 시문되어 있으나 형식화된 느낌이 많다.
귀부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고 있는데, 판석형의 비신에는 전후 면에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얽혀 있으며 아래쪽에 와문(蝸文)이 보인다.
비신 앞면 상단에 전서(篆書)로 ‘普照國師碑銘(보조국사비명)’이라고 제액하였다. 비제는 해서(楷書)로 ‘海東朝鮮國湖南順天府曹溪山松廣寺贈諡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해동조선국호남순천부조계산송광사증시불일보조국사비명병서)’라 하였다.
비문은 고려시대의 문신인 김군수(金君綏)가 1210년(희종 6) 공주지사(公州知事) 재임시에 찬한 것이다. 비문의 끝에 ‘崇禎紀元戊辰五十一年戊午十月日重建沙門雪明(숭정기원무진51년무오10월일중건사문설명)’이라 하여 이 비를 1678년(숙종 4) 10월에 중건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비신 뒷면에는 비음(碑陰 비신 뒷면. 비석 뒷면 새기는 )이 있어 이 비를 새로 중건하게 된 배경을 알려주고 있다. 처음 보조국사비는 국사가 열반한 1210년에 비문이 완성되고 1213년에 비가 세워졌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신 앞면 상단에 전서(篆書)로 ‘普照國師碑銘(보조국사비명)’이라고 제액하였다. 비제는 해서(楷書)로 ‘海東朝鮮國湖南順天府曹溪山松廣寺贈諡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해동조선국호남순천부조계산송광사증시불일보조국사비명병서)’라 하였다.


 



부도암 : 부도는 스님의 사리탑을 말한다

효봉영각 옆 대나무 숲으로 300m 쯤 올라가면 율원(律院)으로 사용중인 부도암이 있다. 건물 편액은 부도전(浮屠殿)이며, 비전(碑殿)이라고도 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29기의 부도와 5기의 비(碑)가 있기 때문이다.

임진·정유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때 큰 피해를 입은 뒤 폐허 속에서 1640년에 영산전(보물 303호)과 약사전(보물 302호)을 중건하는 등 큰 절의 복원에 힘을 기울이다가 1678년에 이르러 백암(柏庵性聰 1631-1700)스님의 원력으로 깨어진 비를 다시 새겨 16국사의 사적을 온전하게 전하니 곧 제1세 보조국사비(지방문화재 91호)와 송광사 사적비이다.

백암스님은 이 해에 이미 이곳에 건립되어 있던 부휴(浮休善修 I543~ 1615) ·벽암(碧巖覺性 1575~ 1660)·송계(松溪性玄 1640년 주지)·뇌정(雷靜應?) ·취미(翠微守初 I590~1668) 유영(柳影圖哲)스님의 부도를 아울러 수호할 암자를 창건토록 제자인 설명(雪明)스님에게 명하니 1689년에 완성하였다.

1776년 와월(臥月敎萍1750~1822)스님이 개강하고 묵암(?庵最訥1717~1790)·향운(香雲昌昊1893~1936)스님이 주석하였으며 1942년 석두(石頭寶澤 1882~1954)스님이 중수하였다.

1828년에 은적암에서 조성하여 부도전에 봉안한 신중탱화(금어 度鎰·壯愈)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백암·묵암스님의 비와 용운(龍雲處益 1813~1888)스님의 공덕비, 그리고 백암·무용(無用秀演 1651~ 1719)·영해(影海若坦 1668~1754)·풍암(楓巖世察 1688~1767)·묵암스님을 비롯하여 근래의 계룡(溪龍奎成 1913~1995)스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스님의 부도가 계보에 따라 여법하게 배열되어있다.

잠깐 보조국사비와 사적비의 음기를 가만히 살펴보라. 1678년 당시의 시주자 중에는 다음과 같은 생소한 글자와 부르는 대로 부담없이 쓴 이름들이 있다.

李 金(이끗쇠)·姜氏 介·裵 金·李氏莫今(이씨막금)·鄭氏愛介(정씨애개!) ·趙¿g達(조작달)·趙介同(조개동)·金 同(김솔동)·車玉乭屎(차옥돌시)·宣淡沙里(선담사리) 德今伊(덕금이).(출처 : 송광사)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松廣寺 普照國師 甘露塔)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松廣寺 普照國師 甘露塔)

송광사 설법전 오른쪽, 지금의 관음전 뒤뜰 언덕에 있는 불일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감로탑이다. 보조국사는 고려시대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로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당시 고려후기의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 감로탑은 맨 아래에 2단의 정사각형 대좌를 놓고 그 위로 네귀퉁이에 각을 이룬 또 다른 대좌를 끼워 넣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매우 특이한 형식이다. 맨 아래 2단의 정사각형 대좌는 그 위에 있는 돌들과 석질이 다른 점으로 보아 1926년 이 탑을 해체복원하면서 새로 끼워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위에는 희미하게 연꽃무늬를 새긴 복련석이 몸돌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 8각의 지붕돌과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감로탑은 보조국사가 고려 희종 6년(1210)에 열반하자 왕으로부터 ‘불일 보조국사’라는 시호와 ‘감로탑’이라는 탑호를 받았으나, 3년 뒤인 강종 2년(1213)에 세워졌다. 그 동안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자리가 옮겨졌으나 지금은 원래의 위치에 있다. 맨 아래 바닥 돌을 제외하고 거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지붕돌의 급격한 전각과 처마의 귀솟음, 둥근 공 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의 모습은 고려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어 주목된다.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은 지눌의 역사적 위상이나 고려시대 사리탑으로서의 학술성 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 불일 보조국사의 감로탑은 송광사 설법전 우측 현 관음전 뒤뜰 언덕에 있다. 보조국사는 고려시대 송광사 16국사중 제1세이며 또한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당시 고려후기의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 국사는 세수 53세, 1210년(희종 6) 음력 3월 17일 열반하였다. 그 해(1210년) 희종이 ‘불일 보조국사(佛日 普照國師)’란 시호와 ‘감로탑(甘露塔)’이란 탑호를 내렸으나 바로 탑비와 탑이 세워지지 않고 3년 뒤인 1213년(강종 2) 음력 4월 10일에 현 설법전 뒤편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감로탑의 외형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정형화된 팔각원당의 변형임을 알 수 있다. 기단부는 맨 하단에 2단의 정사각형 대좌를 안치하고 그 위로 네 귀퉁이에 각을 이룬 호형의 대좌를 삽입하였는데, 이 같은 형식은 매우 특이한 것이라 하겠다. 또 맨 밑의 2단 정사각형의 대좌는 상단으로 연결된 석질과 다른 점으로 보아 1926년 이 탑을 해체복원하면서 새로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 위로 다시 정사각형의 하대석이 연결되는데, 한 돌로 이어진 윗면에는 희미하게 장식된 2단의 복련석이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8각의 옥개석이 이어지고 그 위로는 상륜부가 솟아 있다. 이 감로탑은 그동안 여섯 번이나 옮겨졌다고 하며 현 위치가 원래 세웠던 자리인데 1213년에 세운 보조국사비문, 조계산 산내탑비소재총람도, 1886년의 송광사건물배치지도, 1950년의 송광사전경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감로탑은 덧붙여진 기단부 하단의 일부 지대석(3단)을 제외하면 모두 원형을 고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이 부도에서 특이한 것은 옥개석의 급격한 전각과 처마의 귀솟음, 그리고 원구형을 이루고 있는 탑신의 양식은 고려시대말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 부도에서 탑신이 원구형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초 홍법국사실상탑(1017년)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그 뒤 고려 말의 경기 회암사지 나옹선사부도 및 지공선사부도, 충북 영진국사부도, 강진 백련사 원묘국사 중진탑이라 전해지는 원구형 부도 등 상당수가 있다.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은 1213년에 설법전 뒤에 세워진 이래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이동이 있었으나 현재는 원래 위치에 있다. 그리고 이동과정에서 기단부 일부만 덧붙여졌을 뿐 별다른 변화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불교결사운동의 선구자적 위치에 있는 보조국사 지눌의 역사적 위상이나 고려시대 사리탑으로서의 학술성 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순천시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