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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부 동헌東萊府東軒

노촌魯村 2023. 11. 14. 07:27

동래부 동헌(東萊府東軒.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부의 관아 건물.

동래부 동헌(東萊府東軒)은 조선 시대 동래 도호부(東萊都護府)의 부사가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장소로서 이청(吏廳), 무청(武廳), 향청(鄕廳) 등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된 건물이다.

동래부 동헌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번지에 위치한다.

동래부 동헌은 1636년(인조 14)에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였다. 같은 해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동래부 동헌의 앞대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이 건립되었으며, 1700년(숙종 26)에 독진대아문을 개수하였다. 1711년(숙종 37)에는 동래부사 이정신(李正臣)에 의해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걸고 아헌으로서 개항기까지 사용되었다. 1742년(영조 18)에 망미루(望美樓)[동래부 동헌의 대문 문루,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가 독진대아문 앞쪽에 건립되었으며, 1870년(고종 7)에는 현재의 건물로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동래부 동헌이 동래군청 청사로 이용되었다. 벽면과 천장, 마루 등의 개·보수를 거치면서 목재 등 재료 대부분이 교체되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서쪽 벽은 원래대로이며 문설주와 중방 등이 아직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시가지 정비라는 명분으로 망미루와 독진대아문이 금강 공원 안으로 이전되었으며, 서익랑[공물·형구 보관] 등을 포함한 많은 건물들이 철거·이전되었다.

동래부 동헌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우에 방이 있고 가운데에 대청을 두어, 대청에서 동래부사가 공무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부 동헌은 충신당과 좌우의 동익랑(東翼廊), 서익랑(西翼廊), 동래부 동헌의 대문이었던 망미루, 외삼문인 독진대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익랑은 동헌의 안살림을 맡아 하는 다모방(茶母房)으로 사용되었고, 서익랑은 공물을 보관하는 내유포고(內留布庫), 형구(刑具)를 보관하는 형장고(刑場庫), 사령이 기거하는 흡창방(吸唱房) 등으로 사용되었다.

동래부 동헌의 소유자는 부산광역시이고, 관리자는 부산광역시와 동래구청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5월 8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동래 시장 안에 자리하고 있어 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동래부 동헌은 현재 부산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단일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헌으로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는 유형문화재이다.(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부산역사문화대전)

동래부 동헌 충신당(東萊府東軒忠信堂.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부 동헌의 정당.

동헌(東軒)은 조선 시대에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수령의 살림집을 내아(內衙)라고 하는 데 대해 외아(外衙)라고도 한다. 충신당은 동래부 동헌의 정당(正堂)으로, 이청(吏廳)·무청(武廳)·향청(鄕廳) 등 동래부 소속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의 독경당(篤敬堂), 연심당(燕深堂), 동행랑(東行廊), 서행랑(西行廊)을 비롯하여 찬주헌(贊籌軒), 완대헌(緩帶軒), 동헌의 출입문이었던 동래 도호 아문(東來都護衙門)[망미루], 삼문인 독진 대아문(獨鎭大衙門)과 많은 관아 건물이 부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충신당과 연심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제외한 건물은 철거되었으며, 망미루와 독진 대아문은 금강 공원으로 옮겨져 충신당 건물만 본래의 위치에 보존되어 있으나, 전체 부지가 많이 축소되었다.

동래부 동헌 충신당(東萊府東軒忠信堂)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112번길 61 농협중앙회 동래지점 맞은편에 있다.

동래부 동헌 충신당은 1636년(인조 14) 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였고, 1711년(숙종 37) 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충신당이라고 이름을 지어 아헌으로 사용하였다. 1871년(고종 8) 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종전의 10칸에서 20칸 규모로 크게 지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동래부 동헌 충신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로, 원래는 좌우에 방이 있고 가운데 대청을 두어 수령은 가운데 대청에서 공무를 처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동래군청 등 관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면, 천장, 마루 등이 많이 개조되었다. 서쪽 벽은 원래의 것이며 문설주, 중방 등이 아직 남아 있다. 기단도 정면과 서쪽 측면만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전면에 놓여 있는 디딤돌과 계단은 과거 이 건물의 바닥이 마루였음을 알려 준다.

연심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충신당에 너무 가까이 옮겨 세워져 마치 하나의 건조물처럼 보인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동래부 동헌 충신당은 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단일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헌 건물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부산역사문화대전)

심성루心成樓(동래읍성 서문 현판). 은일루隱一樓(동래읍성 암문 현판)
지희루志喜樓(동래읍성 동문 현판)
무우루無憂樓(동래읍성 남문 현판)

동래 객사(東萊客舍.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14[복천동 229-28])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있던 조선 시대 동래부의 출장 관리 숙소. 조선 시대 동래 수령[사또]은 임금을 의미하는 ‘전(殿)’ 자와 임금이 사는 궁궐을 의미하는 ‘궐(闕)’ 자를 새긴 나무패를 모셔 두고, 매월 1일과 15일, 임금의 생일날 등 나라의 특별한 날에 휘하의 관리들과 함께 절을 하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동래 부사 등이 부임할 때나 고을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에도 객사에 절을 올렸으며, 출장 나온 암행어사 등 관리나 사신들도 이곳 객사에 절을 올렸다. 본래 출장 관리들이 먹고 자게 하던 숙소인 ‘봉래관(蓬萊館)’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공립동래보통학교[현재의 내성초등학교] 등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일제 강점기에 뜯겨졌다.

동래 객사(東萊客舍)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28번지에 있었다. 동래구 복천동 동래 시장 상가 건물 중 서쪽과 그 남쪽, 북쪽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 객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1612년(광해군 4) 동래 부사 성진선(成晉善)에 의해 동상방(東上房)이, 1618년(광해군 10) 동래 부사 윤민일(尹民逸)에 의해 정청(正廳)이, 1629년(인조 7) 동래 부사 유여각(柳汝恪)에 의해 정청의 서헌(西軒)·중문·대문·공수(公須)가 각각 차례로 지어졌다. 이렇게 세워진 객사는 1646년(인조 24) 동래 부사 민응협(閔應協)에 의해 다시 건립된 후, 1703년(숙종 29)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705년(숙종 31)에 다시 지었다.

이후 고종 때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에 의해 크게 고쳐져 조선 시대 말까지 이어졌다.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관립 소학교, 공립동래보통학교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공립동래보통학교 음악실 및 실험관 등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30년대 동래 공설 시장을 개설할 때 뜯겨져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임진왜란 후 다시 지어진 객사는 39칸으로 동쪽은 인빈헌(寅賓軒), 서쪽은 질성헌(秩成軒)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 대문 3칸, 좌우 협문 각 1칸, 행랑 6칸, 북공수(北公須) 8칸이 더 있었다. 고종 때에는 동래 부사 정현덕이 객사를 52칸으로, 내삼문을 10칸으로 각각 크게 고쳤다. 정확한 형태는 잘 알 수 없으나 옛 사진 자료집에 의하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다른 객사와 같이 3개의 지붕을 가진 3채의 집이었겠지만 1채처럼 보인다.

가운데 지붕은 좌우 지붕보다 1단 높은 솟을지붕으로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날개를 퍼덕이는 새처럼 경쾌하기도 하고, 좌우에 이어진 산봉우리를 거느린 큰 산의 주봉(主峰)처럼 장중하기도 하였다. 객사의 바깥 대문이었던 식파루(息波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었고, 1층 가장자리의 기둥은 돌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었다.

현재 동래 객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1994년 동래구에서 동래 객사의 원위치에 세운 표석이 있어, 원래의 위치를 후손들에게 전해 주고 있으며 교육적 자료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동래 객사는 일제 강점기 중간에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는 일본의 계략에 의해, 동래부 동헌(東萊府東軒)과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로서 동래읍성(東萊邑城) 전투(戰鬪)에서 순절한 송상현(宋象賢)을 모시는 송공단(宋公壇) 사이에 동래 공설 시장을 만든다는 이유로 헐려 지금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전해지고 있는 옛 사진 자료를 보면, 동래 객사는 다른 지역의 객사와 마찬가지로 동래부(東萊府)에서 가장 크고 신성한 건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일본과의 외교·국방상 요충지였던 동래부의 객사였기 때문에 부사가 지역 최고의 수령으로 근무하는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동래 객사의 실제 크기는 터에 대한 발굴 조사 등을 거쳐 하루 빨리 밝혀져야 할 것이다.(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부산역사문화대전 동래구)

동래부 동헌 외대문

동래부 동헌 외대문(東萊府東軒外大門.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9)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부 동헌의 외삼문.

동래부 동헌 외대문(東萊府東軒外大門)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9번지에 위치한다. 원래 동래구 수안동 421-56번지에 있는 동래부 동헌 앞에 서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시가지 정리라는 명분 아래 금강 공원 내 숲 속으로 이전되었다가, 2014년 민족정기 회복과 문화재의 효율적인 보존을 위해 동래구 수안동 동래부 동헌 복원 경역으로 이전·복원하였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에 의해 충신당과 함께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700년(숙종 26) 동래 부사 김덕기에 의해 중수되었고, 1870년(고종 7)에는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에 의해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시가지 정리 명분으로 동래부 동헌 앞에서 금강 공원 안으로 이전되었다.

전형적인 관아의 대문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의 지붕이 좌우 협간보다 높은 솟을삼문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천장 밑에 홍살이 설치되어 있다. 대문의 정면에는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어 동래부(東萊府)가 경상좌도 병영 소속 경주진영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東萊獨鎭)이 되었음을 알려 준다. 양쪽 기둥에는 동래부가 진변(鎭邊)의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의 영(營)이란 뜻의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과 왜(倭)와 외교할 때 사신[倭使]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의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란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의 소유자는 부산광역시이고, 관리자는 동래구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동래부 동헌의 외삼문으로, 동래부가 경상 좌도 병영 휘하 경주 진영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이 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독진대아문’이란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조선 시대 전형적인 관아 대문의 양식이 잘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또한 정면과 양쪽 기둥에 걸려 있는 현판의 내용은 조선 시대 국방과 외교의 중심지였던 동래의 지역 특성을 잘 대변하고 있어 중요한 건축물로 평가된다.(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부산역사문화대전)

망미루(望美樓.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12)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부 동헌으로 출입하던 큰 대문.

문루(門樓)란 2층의 누각 형태를 갖춘 큰 대문 건물을 말한다. 망미루(望美樓)는 조선 후기 전형적인 관아 대문으로 부산 지역의 대표적 건물이다. 1895년(고종 32) 동래도호부(東萊府都護府)가 동래관찰사영(東萊觀察使營)으로 승격됨에 따라 포정사(布政司)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누각 위에는 동래읍성(東萊邑城)의 4대문을 열고 닫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

망미루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12번지 일원, 동래부 동헌 복원 경역 내에 위치한다.

망미루는 1742년(영조 18)에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동래부 동헌 앞에 세운 문루이다. 1920년대까지 원래의 자리인 동래 시장 입구[현 수안지구대 맞은편]에 있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시가지 정리라는 명분으로 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동래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경비를 모금하여 현 위치인 금강 공원 입구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건물의 인공적·자연적 훼손이 심하여 1970년에 다시 해체 복원하였고, 1989년에는 서까래와 기단을 보수하였다. 2014년 민족정기 회복과 문화재의 효율적인 보존을 위해 동래구 수안동 동래부 동헌 복원 경역 내로 이전·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된 중층 누각으로서 비교적 큰 건물이다. 누각 밑으로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 누마루의 높이가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누각 아랫부분의 바깥 기둥을 모두 높은 돌기둥[장초석] 위에 세움으로써, 건물의 아랫부분이 약해지는 것을 보완함과 동시에 권위적인 외관을 갖추도록 하였다. 누각 바닥은 귀틀마루로 깔고 사방으로 계자 난간(鷄子欄干)[닭 목에서 가슴까지의 곡선 모양의 난간]을 둘렀다. 천장이 낮은 것으로 보아 누각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 또는 감시용 기능을 가진 건물로 추정된다. 들어가는 문루의 앞쪽 편액(扁額)에는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이라고 써 있으며, 반대편에는 ‘망미루’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망미루의 소유자는 부산광역시이고, 관리자는 동래구이다. 1972년 6월 26일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망미루는 관아 대문의 형식을 알 수 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 동래의 중심 관아이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동래부 동헌의 대문이었던 것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금강 공원 입구에 있었으나, 현재 이전·복원하여 당시 관아 건축의 공간 개념을 재현하였다.(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부산역사문화대전)

고마청雇馬廳(민간에서 징발한 말을 관리하던 곳)
고마청雇馬廳 마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