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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밖(국외)/터어키

에페소스(라틴어: Ephesus, 그리스어: Έφεσος, 터키어: Efes)(1)

노촌魯村 2012. 12. 2. 18:24

 

 

 

 에페소스 : 에페소스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고대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얻어진 수천 개의 비문에 의존한다. 역사에서 에페소스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히타이트 비문인데, 그 비문에 아파사스(Apasas)라고 불렸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측된다. 이 도시의 산꼭대기에는 카리아(Caria)인들이 성을 짓고 살았으며, 훨씬 뒤에는 그리스에서 이주해 온 이오니아 인들이 이 지역에 식민도시를 건립하고 지배했다. 그러나 에페소스의 이름이 역사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리디아의 크로수스 왕이 이 도시를 기원전 560년에 처음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에페소스는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연이어 받으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 두 세력 사이에서 복잡한 흥망성쇄를 거듭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유명한 델로스 동맹이나, 그리스 도시국가와 페르시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도 이 시기에 에페소스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의 에페소스도, 알렉산더 왕의 정복으로 새롭게 융성하기 시작했다. 즉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는 에페소스에 무혈 입성했으며,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는 그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리시마쿠스(Lysinachus)가 기원전 287년부터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와 함께 에페소스를 지배했다.

리시마쿠스는 피온(Pion) 산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고 그 도시를 성벽으로 요새화시켰는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의 유적이다. 리시마쿠스도 기원전 281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와의 전쟁에 패하고 전사함으로써, 에페소스는 또 다른 알렉산더의 장군 셀레우코스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기원전 190년에는 북부에서 세력을 펼치던 페르가몬(성경의 버가모) 왕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인 아타로스(Attalos) 3세가 자신의 왕국을 로마제국에 자진 헌납함으로써 에페소스는 이제 그리스 시대에서 로마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과중한 세금부담과 압제에 대항해서 일어난 폰투스(Pontus:성서의 본도)의 왕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의 반란으로 파괴가 되기도 했지만, 에페소스는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의 아시아 수도를 페르가몬에서 에페소스로 옮기고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기원전 33년 로마황제 안토니우스(Antonius)는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후에 Augustus로 개명)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에페소스에 머물기도 했다. 에페소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로마의 5대 도시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기원 후 1세기에 에페소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바올은 그의 2차와 3차 전도 여행 때 에페소스를 방문하여 선교를 위해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받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스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64년 사도 바올(Paul)이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소스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페르가몬, 에페소스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Patmos:성서의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해 이 곳에서 "요한 계시록"을 썼다.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이 피살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소스에 묻혔으며, 비잔틴 제국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 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세워졌다. 7-8세기에 들어와 에페소스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받았다.

그 후 터키인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입해 들어오자 1304년에는 터키의 수중에 떨어졌다. 터키의 통치 하에서 에페소스는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사 베이 모스크는 이 시기에 세워진 대표적인 사원 건축물이다. 에페소스는 오스만 터키 제국 시대에 들어 과거의 화려한 기능을 상실하고 오늘에 이르렀다.(한국-터어키 친선협회 자료) 

 

 

 

 

 

 

 

  

  

바리우스 목욕탕

발굴된 비문에 의하면 이 목욕탕은 플라비우스(P.Flavius)와 그의 아내가 비용을 부담해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역시 다른 목욕탕과 마찬가지로 냉탕, 온탕, 열탕 및 풀장과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다.

  

  

  

  

 

 

  

 오데온(Odeion)과 프리타네온(prytaneion) : 도시에서 종교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가장 높은 직위는 남녀 모두가 임명될 수 있었던 프리탄(Prytan) 직위였다. 그들의 임무는 프리타니움(Prytanieum)에 위치해 있던 도시의 성화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었다. 프리탄들의 또 하나 중요한 임무는 도시 내에 있는 성소를 감독하는 것이며 일상의 제물로 쓰이는 동물을 공급하는 것이다. 기독교 초기 이곳은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데온(Odeion) 원형소극장

  

 

  

   

      

 

  

  

 

 

 

 

 병원 표시

 

메미우스(Memmius) : 기념물 도미티안 신전 북쪽에 위치한 이 건물은 기원전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이 건물에 새겨진 라틴어 비문은 "구세주(Caius Memmius)는 카이우스(Caius)의 아들이요, 코르넬리우스 술라(Cornelius Sulla)의 손자다"라고 쓰여 있다. 이 기념물은 300년 후에 우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부조

   

   

  

Ephesus - Efes   

Reconstruction Ephesus(에페소스 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