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삶의 맥락을 기록하다."

기타/각종정보

「강화 정족산 전등사 일원」 명승 지정 예고- 정족산의 자연지형을 배경으로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형성한 역사문화경관

노촌魯村 2026. 8. 10. 10:40

  국가유산청(청장 허민)은 정족산의 자연지형과 삼랑성전등사정족산사고, 사찰림 및 옛길 등 다양한 인문환경이 어우러져 역사문화경관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 「강화 정족산 전등사 일원」을 국가지정자연유산 명승으로 지정 예고한다.  

강화 정족산 전등사 일원」고려시대 가궐과 국가 불교의례조선시대 사고와 선원보각병인양요 승전지 등 여러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한 공간에 중첩되어 있는 곳이며고려 이색을 비롯한 많은 문인의 유람 기록과 고문헌을 통해 오랜 세월 역사와 문화가 축적된 장소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가궐(假闕:) 임금이 대궐을 멀리 떠났을 때 임시로 머무르는 곳 

정족산의 산봉우리와 자연지형을 활용해 조성된 포곡형의 산성인 삼랑성과 자연 사면을 따라 배치된 전등사사찰림과 노거수, 개방감 있는 조망경관이 조화를 이루며 자연과 인문환경이 하나의 경관구조를 형성하고 있다특히 전통적인 산지가람의 입지와 자연지형에 순응한 산성과 사찰의 배치는 뛰어난 경관적 가치를 보여준다. 

아울러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조선왕조실록」「강화전도」 등 다양한 문헌과 고지도에 정족산과 전등사의 역사와 경관이 기록되어 있어 자연경관과 역사문화가 오랜 기간 축적·계승되어 온 장소임을 보여준다또한 랑성과 전등사를 잇는 옛길은 사찰 참배와 유람지역 주민의 생활을 연결하던 통로로 활용되어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이번에 지정 예고한 「강화 정족산 전등사 일원」에 대하여 30일간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국가유산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명승으로 지정할 계획이며 체계적인 보존·관리와 함께 국민이 그 가치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활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적극행정을 이어갈 것이다.

□ 지정명칭 : 강화 정족산 전등사 일원

 ㅇ (한자) 江華 鼎足山 傳燈寺 一圓

 ㅇ (영문) Jeondeungsa Temple and Surroundings in Jeongjoksan Mountain, Ganghwa 

□ 지정종별 : 자연유산(명승)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일원 

□ 지정구역 : 15필지 154,370.2

□ 관리단체 : 인천광역시 강화군, 대한분교조계종 전등사

□ 지정근거 : 「자연유산법 시행령」 별표1호 가목 3), 나목 2), 다목 3)

 ㅇ 종교, 사상, 전설, 사건, 저명한 인물 등과 관련된 것

 ㅇ 자연물‧인공물의 희소성이 높아 보존가치가 있는 것

 ㅇ 정자·누각 등의 조형물 또는 자연물로 이루어진 조망지로서 자연물자연현상, 주거지, 유적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저명한 장소인 것 

□ 지정사유

 ㅇ‘강화 정족산 전등사 일원’은 정족산의 자연지형을 배경으로 삼랑성전등사정족산사고사찰림 및 옛길 등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형성한 역사문화경관 명승임고려시대 가궐과 국가적 불교 의례조선시대 사고와 선원보각병인양요 승전지 등 여러 시대의 역사적 층위가 산지 공간에 중첩되어 있으며고려의 이색을 비롯한 많은 문인의 유람 기록과 다양한 고문헌을 통해 오랜 세월 역사와 문화가 축적된 장소성을 보여줌 

 ㅇ 또한 정족산의 포곡형 산지와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랑성자연 사면을 따라 배치된 전등사사찰림과 노거수옛길 및 개방감 있는 조망경관이 조화를 이루어 뛰어난 경관적 가치를 지님

출처 : 국가유산청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사적  제130호.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출처:문화재청)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른다. 마니산 참성단과 더불어 단군과 연관된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귀한 역사 유적이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의 세 아들이 삼랑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다.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의 둘레는 대략 2,300m이다.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거친 할석(割石)을 사용한 삼국시대의 축성 기법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한다. 1739년(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영조 40) 다시 성을 중수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오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전지이다. 삼랑성 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 대몽항쟁기에 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는데 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후반 정족산 사고를 짓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등을 봉안했으며, 군사 시설로 정족진을 설치했었다(출처:강화군청)

삼랑성 남문



삼랑성 동문 및 양헌수 전승비각

양헌수(梁憲洙):  1816년(순조16) ∼ 1888(고종25).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 자는 경보. 부사정 종임의 아들이다.
이항로의 문인으로 무예를 익혔다. 1848년(현종14)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에는 삼상관에 올랐다.
1865년(고종2) 제주 목사로써 전 판관 배기호의 탐학을 징치하도록 하여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고, 이해 가을 극심한 태풍의 피해를 복구하는 한편, 진휼을 요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한해를 더 잉임하였다.
1866년 어영청의 천총으로 준천사의도청을 겸하다가 병인양요를 당하여 정족산성의 수성장이 되었다. 순무중군 이용의 명령에 따라 별군관 이현규와 함께 17명의 초관과 경초군 121명, 표하군 38명, 포수 367명을 이끌고 광성진 의 손돌 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지키던중 10월 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 제독이 해군대령 올리비에의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내었으며 대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병사로 재직중이던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설한 별위사제도의 격려방안으로 매년 도시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연포로 포상하였으며 이와 같은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을 더 잉임하였고 이듬해에는 당시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시하기도 하였다.
1875년 어영대장에 임명되었고, 1874년 좌변포도대장을 지냈다. 1875년 2월 형조판서가 주어졌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던 듯 하며 8일 뒤 금위대장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 홍순목, 이용희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집권한 대원군은 민비의 상을 치르는 한편 척족세력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면서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때 조영하, 김병시, 김기석 등과 함께 지삼군부사에 임명되었다.
1884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887년 독련사가 되었다. 시호는 충장이다. 정족산성에서의 전투는 서양국가와의 최초의 전쟁으로 당시 서양 세력이 동양인을 깔보고, 식민지 정책을 확장하던 때인지라 이 한마당 싸움으로 그들의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하여준 쾨거라 하겠다. 당사 프랑스는 동양함대를 앞세우고, 종교적으로(천주교) 민심을 사고 무력으로 안남제국(월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석권하고 인도네시아의 넓은 영역을 제압한 프랑스는 본국의 50배도 넘는 영토를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그 위세를 영국과 더불어 세계 만방에 떨치며 오만 방자하게 약소국가를 위협하고 괴롭혔다.
이 프랑스군이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성을 공략하고, 양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여 성안은 아비규환 그것이었으며, 당시 강화성에는 외규장각이 있어 국보급 장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강화행궁 안에는 금, 은, 보화와 진귀한 보물이 꽉 차 있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반출 도적질하여 가지고 갔으며, 그 외 것은 불질러 다 태워버리고 성안의 궁궐, 민가 할 것없이 닥치는 데로 불살라 버리고 도주하여 강화성은 황폐화되었다. 현재도 프랑스와 외교적으로 타협하여 국보급 문화재 반환 교섭을 하고 있으나 프랑스의 무성의로 반환이 이루워 지지 못하고 있다.
전등사 동문 안에는 그의 위대한 호국승전을 기리기 위한 승전비가 있다. 정족산성 남문 바로 왼쪽에 밑글텅만 남은 썩은 고목나무 한그루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데 나라에 위험이 닥칠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동양함대 침공이 있었던 10월의 밤에도 이 나무는 밤새워 울었다고 한다. 양헌수 부대는 이 나무의 울음소리를 듣고 프랑스군의 침공을 미리 감지하고 만반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출처:강화군청)







성벽상부


수구문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의 정족 산성 안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있었던 사고. 정족산사고가 설치된 계기는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가 1653년(효종 4) 11월 실록각(實錄閣)의 실화사건(失火事件)으로 많은 사적들을 불태우게 되자 새로이 정족 산성 안에 사고 건물을 짓고, 1660년(현종 1) 12월에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정족산사고본 실록들은 많은 변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실록들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파손되어 빈터만 남아 있던것을, 전등사에 보존되어 오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당시의 현판과 함께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정족산사고함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

출처: https://bosar.tistory.com/13434191 [도귀들의 여행:티스토리]

대조루에는 목은(牧隱) 이색의 시가(詩歌)가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막신 산길 산길 끌며 청아한 맛 즐기는데

전등사의 늙은 스님 내 갈길을 알려준다

창틈으로 보인 뫼는 하늘가에 닿아있고

누각 아래 부는 긴 바람 물결되어 여울지네

별자리들 아득하게 왕 별 속에 파묻혔고

안개둘린 삼랑성에 자그맣게 보이누나

정화공주 발원 깃대 누가 다시 세워주랴

먼지 찌든 벽 글 보니 길손 가슴 아프구려

전등사대조루(傳燈寺對潮樓.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대조루에서는 저녁의 지는 해와 밀려오는 조수를 대할 수 있어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1748년(영조 24) 주지 초윤(楚允)과 화주인 보학(寶學) 등이 고쳐 지었다고 하며, 1841년(헌종 7)에는 화주 연홍 등이 중건했다고 ≪전등본말사지≫에 명기되어 있다. 이후 1749년에는 중수하는 과정에서 재목이 부족하자 상영(上營)에 요청하여 누각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1932년 사찰 안의 건물들을 중수하면서 이 누각도 중건하였다. 경내 입구에 세운 누각으로 공포는 초익공(初翼工) 형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었다. 현재 대조루 내부에는 목어와 법고가 있고, 네 벽에는 현액과 1659년(현종 1) 향산(香山)에서 옮겨와 세웠다는 선원보각·장사각의 현판 1726년(영조 2)에 왕이 직접 행차하여 썼다는 ‘취향당’ 현판 등이 가득 차 있다. 지금은 불교서적과 기념품 등의 판매점으로 사용되고 있다.(강화군청 자료)


전등사 옛 사진(일제시대. 조선고적도보)

강화 전등사 대웅전(江華 傳燈寺 大雄殿.보물 제178호.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온수리))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물로 전등사의 중심 예배공간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1605년(선조 38)과 1614년(광해군 6)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 대웅전도 1621년에 지어졌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내부에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木板)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 등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출처:강화군청)






지붕 끝의 연봉


전등사 대웅보전 옛 사진(일제시대. 조선고적도보)


대웅보전 전면 향(向) 우측 추녀 아래 나부상


대웅보전 전면 향(向) 좌측 추녀 아래 나부상 


대웅보전 후면 향(向) 우측 추녀 아래 나부상

   

대웅보전 전면 향(向) 좌측 추녀 아래 나부상







전등사대웅보전목조삼존불좌상

(傳燈寺大雄寶殿木造三尊佛坐像.인천  유형문화재  제42호)

전등사 대웅보전(보물 제178호)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불좌상으로서 주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좌측)와 아미타여래(우측)를 모신 삼세불좌상이다.
조선 광해군 15년(1623년)에 조성된 불상으로 얼굴과 신체, 의습 표현에서 드러나는 볼륨감과 생동감 있는 분위기, 뛰어난 조각솜씨가 돋보일 뿐 아니라 조성기(造成記)까지 갖추고 있어 17세기 전반의 조각양식과 조각승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자료) 

 
  
 

 전등사 대웅보전 불단 옛 사진(일제시대. 조선고적도보)


전등사업경대(傳燈寺業鏡臺.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7호) 

업경대는 망자의 죄업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는 거울로 업경륜이라고도 한다.
전등사 업경대는 황색사자와 청색사자 1쌍으로 목각 사자의 몸체와 등 위에 커다란 화염문 거울이 꽂혀있다. 규모는 높이 107cm, 길이 65cm이다.
좌대 바닥에 ‘천계칠년정묘구월 십삼일 각록목화원밀영 천기 봉생(天啓七年丁卯九月 十三日 刻祿木畵員密英 天琦 奉生)’이라는 묵서 명문이 남아 있어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등사 업경대는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의 편년 설정·상호비교 연구의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자료) 

 

전등사 대웅보전 기둥에 새겨진 조선말의 병사 이름들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출처: https://bosar.tistory.com/13432378 [도귀들의 여행: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