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주 621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

바다가 육지라면 조미미 노래(1971년) 얼마나 멀고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어제 온 연락선은 육지로 가는데 할 말이 하도 많아 목이 메어 못갑니다. 이 몸이 철새라면 이 몸이 철새라면 뱃길에 훨훨 날아 어디든지 가련 만은 바다가 육지라면 이별은 없었을 것을 조미미(曺美美, 1947년 1월 17일 ~ 2012년 9월 9일)는 대한민국의 여성 가수이다. 전라남도 영광에서 출생한 그녀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성장하였고 1965년 〈떠나온 목포항〉으로 데뷔하였으며, 1969년 발표한 〈여자의 꿈〉은 크게 인기를 끌었다. 〈바다가 육지라면〉, 〈선생님〉, 〈먼데서 오신 손님〉 ..

불세출不世出의 가수 배호의 '마지막 잎새 ' 노래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의 남사저수지가에 ‘마지막 잎새’ 노래비가 있다. 일천곡이 넘는 대중음악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노랫말로 심금을 울린 한국가요계의 거장 정귀문鄭貴文 선생이 살던 곳이다. 1941년 경주시 현곡면 하구3리에서 정용범·허숙희 슬하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한 정귀문은 1967년 세광출판사의 신인 작품 공모에서 ‘만추’로 당선돼 작사가로 데뷔했다. 대표 대표곡으로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이미자 ‘꽃씨’, 김연자 ‘먼훗날’, 봉은주 ‘동네방네 뜬소문’, 최안순 ‘안개 낀 터미날’ 등이 있고, 특히 1971년 요절한 배호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노래인 ‘마지막 잎새’의 가사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정귀문 선생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 경주시 현곡면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래서 경..

경주 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慶州 南山 佛谷磨崖如來坐像의 낮은 고도의 햇살로 촬영(2021.12.24)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慶州 南山 佛谷 磨崖如來坐像. 보물. 경북 경주시 인왕동 산56번지) 경주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이다. 불상의 머리는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이것은 귀 부분까지 덮고 있다. 얼굴은 둥그렇고 약간 숙여져 있으며, 부은 듯한 눈과 깊게 파인 입가에서는 내면의 미소가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인왕리석불좌상과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자세가 아름답고 여성적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아래로 길게 흘러내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는데, 옷자락이 물결무늬처럼 부드럽게 조각되어 전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석불은 경주 남산에 남아있는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 – 다름이 만든 다양성” -국립경주박물관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 특별전 개최-

■ 전 시 명: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 – 다름이 만든 다양성” ■ 전시기간: 2021. 11. 24.(수) ~ 2022. 3. 20.(일) ■ 전시장소: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 주요전시품: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출토 황금보검 등 172건 253점 ※ 지정문화재: 황남대총 출토 금목걸이 등 국보 2건, 보물 6건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최선주)은 2021년 11월 24일(수)부터 2022년 3월 20일(일)까지 특별전시관에서 특별전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다름이 만든 다양성’을 개최한다. 고대 한국 사회는 다양한 이질적 문화 요소들이 어우러지고,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외래계 문물’이다. ‘외래계’란 토착, 재지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예전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니라 밖..

두 주먹 불끈 쥐고 ... 햡! - 진리의 수호자守護者인 사자獅子. 부처님의 영원한 보디가드 bodyguard!(경주慶州 장항리獐項里사지寺址에서) -

사자獅子 : 사자는 고대인도, 페르시아, 아시리아, 소아시아 등 서아시아 지역에 많이 서식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사자는 서역의 동물로 용맹하고 위엄 있는 상징적인 존재로 여겼다. 주로 불교와 함께 전래되기 때문에 코끼리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상징미술에 자주 등장한다. 금당으로 보이는 건물터에 있는 석조불대좌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경주 장항리 사지(慶州 獐項里 寺址. 사적.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1081번지) 토함산 동남쪽 계곡의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절터가 있는 계곡은 대종천의 상류로 감은사터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간다. 절을 지은 연대나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장항리라는 마을 이름..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慶州 芬皇寺 幢竿支柱)’ 보물 지정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慶州 九黃洞 幢竿支柱)」를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라는 이름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였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는 분황사 입구 남쪽과 황룡사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고대 사찰 가람에서의 당간지주 배치와 분황사 가람의 규모와 배치, 황룡사 것으로 보이는 파손된 당간지주가 황룡사지 입구에 자리한 예가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구황동 당간지주는 분황사에서 활용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문화재명인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를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로 이름을 고쳐 지정하였다. * 가람: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참고로, 당간지주는 당을 걸기 위한 당간을 고정하는 지지체로 통일신라 초기부터 사찰 입..

기림사祇林寺

기림사는 27대 선덕여왕 때인 643년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당시 이름은 ‘임정사’였는데 원효대사가 와서 ‘기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31대 본산의 하나로 불국사를 비롯해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대한 사찰이었다.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가 되었지만, 비로자나 삼신불이 봉안된 대적광전(보물제 833호)과 약사전, 오백나한을 모신 응진전,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진남루 등 귀한 유산을 품고 있다.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이다. 보문 415호인 대적광전은 조선 초기 불상의 전형을 갖추고 있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오백나한전이 있고, 그 바로 앞에 높이 3m쯤 되는 아담한 3층석탑이 있다. 배흘림 양식으로 세워진 탑은 처마 끝은 살짝 들리어 가뿐..

매월당 영당(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기림사)

매월당은 김시습의 호이다. 매월당은 경주 남산 용장골에 조그만 산실을 짓고 7년을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곳에 사당이 있었다. 영조 44년(1768)에 부윤 홍술해가 당을 개축하여 위판을 봉인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후에 금령에 의해 훼절되니, 고종15년(1878)에 이를 애석히 여긴 경주유림이 기림사 주지스님에게 부탁하여 기림사로 옮겨 세워 초상(肖像)을 봉안하고 여기에 딸린 논밭을 함께 넘겨주었다. 최근(1996)에 당이 무너질 염려가 있자, 경주유림의 요청으로 경주시가 시비를 들여 절 담장 안에 새로 사당을 지었으며, 무량사 김시습 사당에 그려져 있는 자화상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매월당 김시습이 남긴 수많은 시가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시(詩) 중의 하나가 세상인심의 변..

경주 黃龍골 황용사지黃龍寺址

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길을 따라 약 20분쯤 달리다 보면 덕동댐이 나타나고 조금 더 가면 황룡동 사시목에 이른다. 여기에서 북쪽계곡을 따라 좁은 산길로 2km정도 올라가면 속칭 '절골'이라고하는 계곡이 서북쪽으로 계속되고 있다. 계곡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황룡사라고 하는 조그마한 절이 있는데, 1987년 2월부터 종연(宗然) 스님이 이곳에 있던 민가를 사들여서 불사를 일으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곳 황룡사에서 보면 계곡 북쪽 산중턱에 대나무숲과 함께 자연석으로 쌓은 석축이 높이 약 3m, 길이 20m 정도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석축 위에는 폭이 좁고 동서로 긴 부지敷地에 무너진 석탑 2기가 대나무숲 앞에 1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놓여 있는데 이곳이 황룡사터이다. 탑은 무너져서 하층기단 일부만..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慶州 西岳洞 三層石塔)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慶州 西岳洞 三層石塔. 보물. 경북 경주시 서악동 705-1번지)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무열왕릉 동북쪽 비탈진 곳에 서 있다. 모전탑은 전탑(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을 이른다. 기단(基壇)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이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仁王像..

경주 용명리 삼층석탑(慶州 龍明里 三層石塔)

경주 용명리 삼층석탑(慶州 龍明里 三層石塔. 보물. 경북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856-7번지) 용명리의 절터 주변은 민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절의 규모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과거에는 탑 이름을 ‘명장리삼층석탑’이라 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용명리사지탑’이라는 이름 역시 확실하지 않다. 석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가운데에는 그 기둥이 2개씩이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씩이고, 각 몸돌마다 네 모서리에 기둥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경사면의 곡선이 강하여 네 귀퉁이가 느리게 위로 들려 있다. 기단의 구성과 탑신을 받치는 괴임, 지붕돌받침의 조각수법으..

서악동 바위 구멍 유적

서악동 바위 구멍 유적(경북 경주시 서악4길 80-100) 이 유적은 표면에 크고 작은 홈들이 500여개 새겨져 있어 성혈性穴바위 또는 바위 구멍으로 불린다. 제작 시기는 선사시대로 추정되며, 바위 크기는 장축 753 cm, 단축은 210cm이다. 바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여러 선들이 연결되어 있어 농경시대의 민간 신앙과 관련된 유적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형태의 바위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이는데 학계에서는 바위 구멍을 별자리와 태양숭배, 풍요와 다산의 상징물 등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알바위, 알터와도 관련이 있다. 에는 이곳을 용작곡龍作谷으로 표기하고 있어 용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慶州 西岳洞 磨崖如來三尊立像)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慶州 西岳洞 磨崖如來三尊立像. 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1) 선도산 정상 가까이의 큰 암벽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왼쪽에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다.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미타여래입상은 손상을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눈 있는 부분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뺨, 턱, 쫑긋한 입의 표현은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넓은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웅장한 체구는 신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범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해 보이며, 앞..

경주 진흥왕릉(慶州 眞興王陵). 경주 진지왕릉(慶州 眞智王陵). 경주 헌안왕릉(慶州 憲安王陵). 경주 문성왕릉(慶州 文聖王陵). 경주 법흥왕릉(慶州 法興王陵)

경주 진흥왕릉(慶州 眞興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번지)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의 무덤이다. 진흥왕은 지증왕의 손자로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고,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여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 점령지에 척경비를 세웠다.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를 세웠다. 또한 삼국통일의 중추세력인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높이 5.8m, 지름 20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된 이 무덤은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신라 왕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무덤으로서..

국립경주박물관 - 특별공개 '傳 황복사 터 출토 신자료' -

국립경주박물관은 2021년 특별공개 전시로 '전傳 황복사 터 출토 신자료'를 개최합니다. 황복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625-702)이 출가한 사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사람과 탑을 돌면서 계단이 아닌 허공을 밟고 올랐다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런데 황복사터를 황복사라 단정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적 주변에서 황복사皇福寺라고 씌어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사찰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파악하기 어려워 명칭 앞에 전傳자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 유적에서는 기단석으로 사용되던 십이지신상이 확인되어 1920년대 후반부터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942년에는 절터 내 삼층석탑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습니다. ..

세계 名車들 경주 총집합 –경주세계자동차박물관-

세계 名車들 경주 총집합 –경주세계자동차박물관- 경주세계자동차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로 2017년 3월 29일 경주시민 등을 초청 개관식 행사를 개최하였다. 경주세계자동차박물관은 1886년 세계 최초내연휘발유 자동차인 독일의 벤츠 페이턴트카를 비롯해 헐리웃 스타가 사랑한 명차, 역대 대통령이 이용했던 차, 추억의 명화 속 한 장면을 연출하는 클래식 카, 예술적가치가 높은 희귀 자동차, 젊은 층이 애호하는 F-1카 등을 볼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타던 크라이슬러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방을 다닐 때 타던 자동차는 1969년 생산한 크라이슬러의 뉴요커다. 1886년 생산한 세계 최초의 내연 휘발유 자동차는 독일 벤츠의 ‘페이턴트’다. 미국에서 가장오래 살아남은(2004년 기준) 자동차..

황성공원(皇城公園)과 맥문동

황성공원(皇城公園. 경주시 원화로 431-12)과 맥문동 황성공원은 삼릉에 뒤지지 않는 멋스러운 소나무와 수 백 년 수령을 자랑하는 고목이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룬다. 여름이면 솔숲 산책로에 맥문동 군락이 조성되어 수려한 풍광을 더해주고, 가을이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고목이 아늑하게 물든다. 황성공원 중간에 솟아오른 동산에 자리한 김유신 장군 기마상도 볼거리다. 그리고 충혼탑, 6.25 참전· 월남전 참전 명예선양비, 박목월 노래비(얼룩송아지), 동리東里 김시종金始鍾 선생의 문학동산 비, 동전東田 서정수 시비(낮달), 복양 오세재 선생 문학비, 이경록 시비(사랑歌), 이임수 시비(풍경소리),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 있다. 경주시는 2015년부터 황성공원에 맥문동麥門冬을 심기 시작해..

경주 남천(南川) 교촌교와 문천교 사이의 둔치 해바라기

남천(南川) 신라시대부터 경주 월성 앞에 있는 제법 중요한 하천이었다. 남산에 가려면 건너야 했고, 그로 인해 월정교가 건설 되었다. 또 남궁으로 추정되는 現 국립경주박물관 쪽으로 건너는 다리 일정교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문천(蚊川)이라 하였는데, 이는 토박이말 몰갱이(모래)가 모갱이(모기)랑 비슷해서 문천, 즉 모기내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이 붙었다. 상류 구간은 사등이천(史等伊川)이라 부른다고 한다. (출처: 최용주-역사의 땅 경주, 아름다운 전설과 함께하다.) 강변의 도로는 북쪽으로는 서천야구장부터 월정교까지는 강변로, 오릉교부터 국립 경주 박물관까지는 일정로가 있고 그 외의 작은 도로들이 있다. 시내에서는 그렇게 가깝지는 않지만 유명 관광지 황리단길에서는 제법 가깝다. 남천을 따라가면 많은 관..

황성공원(皇城公園)의 맥문동(麥門冬)

황성공원(皇城公園)의 맥문동(麥門冬) 황성공원은 삼릉에 뒤지지 않는 멋스러운 소나무와 수 백 년 수령을 자랑하는 고목이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룬다. 여름이면 솔숲 산책로에 맥문동 군락이 조성되어 수려한 풍광을 더해주고, 가을이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고목이 아늑하게 물든다. 황성공원 중간에 솟아오른 동산에 자리한 김유신 장군 기마상도 볼거리다. 경주시는 2015년부터 황성공원에 맥문동麥門冬을 심기 시작해 현재 약 1.5ha가 넘는 부지에 맥문동 단지를 조성했다. 맥문동은 백합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그늘에 잘 자라며 높이는 30~50센티미터이고, 뿌리는 짧고 굵으며 한약재로 쓰인다. 잎은 짙은 녹색이고 뿌리에서 뭉쳐나며 난(蘭) 모양으로 사철 푸르며 8월에 보라색 꽃을 피운다. 황성공원의 맥..

경주 동부사적지대 꽃 단지(7월)

첨성대, 동궁과 월지, 월성, 계림을 아우르는 드넓은 동부사적지대 일원에는 계절별로 화초 군락과 야생화 단지가 조성된다. 봄 유채, 봄과 여름 사이 양귀비, 접시꽃, 여름의 연꽃, 플록스, 백일홍, 황화코스모스, 가을의 핑크뮬리 등 매 계절 매 다른 색감으로 여행자의 발길을 부여잡는다. 첨성대 꽃 단지의 7월에는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뻗은 줄기에는 해를 닮은 노란 꽃의 해바라기와 연꽃이 그 빛을 강렬하게 뽐낸다.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慶州 高仙寺址 三層石塔)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慶州 高仙寺址 三層石塔. 국보.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탑신도 여러 개의 돌이 조립식으로 짜 맞추어져있으나,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지붕돌은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는데, 아래로 미끄러지는 네 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개최

신라의 사찰을 사진으로 만나다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개최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최선주)은 2021년 6월 30일(수)부터 2021년 10월 3일(일)까지 특별전시관에서 사진전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를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은 올해 말 신라미술관 개편에 앞서 신라 불교 미술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기획하였다. 문화재 사진으로 유명한 한석홍, 안장헌, 오세윤 작가가 수십 년에 걸쳐 찍은 사진들 가운데 경주 지역 불교 유적을 담은 57점을 골라 선보인다. 조선시대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쇠락한 경주 분황사(芬皇寺)를 보며 “황룡사(皇龍寺)와 마주하여 서 있는 분황사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芬皇寺對黃..

국립경주박물관의 다보탑 석가탑

- 다보탑 석가탑 신건기 - 토함산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통일신라기의 예술작품으로 우리 국보 제20호 다보탑과 제21호 석가탑이 서 있다.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착상과 정교하면서도 수려한 솜씨라 그 시대 석탑 예술품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게 치는 작품이요, 거기 겨레의 얼이 배어들었기(에) 봄, 가을 천년 세월이 지났건만 신라사람 숨소리 귀에 들린다. 그러나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절묘한 옛 모습 사라져 가므로 박정희 대통령이 그것을 보고 미리 먼 뒷날을 걱정한 나머지 두 탑을 새로 만들라 분부했다. 이 방면 학자들과 기술진들이 옛 탑의 석질과 같은 돌을 찾아 월성군 외동면 북토리 산에서 풍화에 강한 화강암을 캐어와 두 탑의 원형대로 새로 만들어 이곳 박물관 뜰에 세우는 뜻은 첫째, 옛 탑 전통을 잇자함이요,..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慶州 羅原里 五層石塔)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慶州 羅原里 五層石塔. 국보.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676) 나원리 마을의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나원 백탑(白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가운데 조각을 아래층은 3개씩, 위층은 2개씩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

한국의 돈황이라 칭하는 골굴사(骨窟寺)

한국의 돈황이라 칭하는 골굴사(骨窟寺)(경주시 문무대왕면 기림로 105-5) 골굴사는 토함산의 이웃산인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잔 오랜 역사를 품은 절이다. 불교가 국교로 번성하던 신라시대 6세기 경, 인도에서 온 광유(光有) 성인 일행이 12개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했다.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인공 석굴사원으로 한국의 둔황석굴이라고도 불린다. 가장 꼭대기 석굴에는 보물581호로 지정된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국내 관광객은 물론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사찰 골굴사는 선무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절이다. 마음의 평화와 참 나를 찾는 불가 전통의 수행법인 ‘선무도’를 체험하고, 시연하는 프로그램이 골굴사에 마련되어 있다. 골굴암 이름의 유래 신라 불상의..

경주 쪽샘 44호 적석목곽묘

최근 여러 방송 매체에서 쪽샘 44호분의 발굴과정과 출토유물이 소개되면서 쪽샘유적과 신라 고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마련한 행사이다. 쪽샘유적은 신라 왕족과 귀족 등 최고 지배계층의 집단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라 고분의 학술적 가치를 밝히기 위해 쪽샘 44호분은 2014년부터 8년째 정밀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44호분은 지름이 30m에 이르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둘레돌 밖에서는 제사에 쓰였던 큰 항아리와 함께 기마행렬(騎馬行列), 무용(舞踊), 수렵(狩獵) 등 다양한 모습을 선으로 그린 목긴항아리가 발견된 바 있다. 또한. 2020년 내부조사 과정에서 무너진 흙과 돌을 걷어내자, 무덤 주인공이 묻혔던 공간이 1,500여 년 만에 세상에 나온 바 있다. 국립경주문..

문호사(文湖社)

문호사(文湖社. 경북 경주시 첨성로 160-8(인왕동 817-1)) 경상북도 경주시 첨성로 160-8(인왕동 817-1)에 있는 조선중기 성리학자이면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관란(觀瀾) 이승증(李承曾. 1515:중종10년–1599:선조32년)을 제향하는 사당이다.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희로(希魯), 호는 관란(觀瀾). 경주 출신. 아버지는 훈도 이계간(李季干)이며, 어머니는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다. 김대유(金大有)의 문인이다. 이승증은 1558년(명종 13)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후, 추천으로 건원릉참봉, 사옹원제조, 상의원제조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며 후학양성에만 주력하였다. 또한 78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동보(崔東輔), 최여호(崔汝..

경주동부사적지대 - 첨성대 -

경주 첨성대(慶州 瞻星臺. 국보31호.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번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

경주 명활성(慶州 明活城)

경주 명활성(慶州 明活城. 사적 제47호. 경북 경주시 보문동)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진흥왕 때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