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주 607

경주 계림로 보검(慶州 鷄林路 寶劍)

경주 계림로 보검(慶州 鷄林路 寶劍. 보물 제635호.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계림로 보검(慶州 鷄林路 寶劍)은 경주 황남동에 있는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견된 길이 36㎝의 칼이다. 1973년 계림로 공사 때 노출된 유물의 하나로, 철제 칼집과 칼은 썩어 없어져 버리고 금으로 된 장식만이 남아 있다. 시신의 허리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자루의 끝부분이 골무형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붉은 마노를 박았다. 칼집에 해당되는 부분 위쪽에 납작한 판에는 태극무늬 같은 둥근무늬를 넣었다. 삼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고리자루칼(환두대도)과 그 형태와 문양이 다른데, 이러한 형태의 단검은 유럽에서 중동지방에 걸쳐 발견될 뿐 동양에서는 발견되는 일이 없어, 동·서양 문화교류의 한 ..

금관金冠( 경주 교동. 신라5세기)

경주 교동. 신라5세기 경주 교동의 한 무덤에서 도굴되었다가 1972년 압수된 금관입니다. 지름이 비교적 작은 관테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을 세웠습니다. 이 장식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산山자 모양의 나뭇가지와는 달리 비교적 사실적인 나뭇가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관테나 장식의 가징자리에는 다른 금관들과는 달리 점무늬 도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지않습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지금까지 발견된 6개의 신라 금관(금관총·금령총·서봉총·교동·천마총·황남대총 북분)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크기도 자장 작은 이 금관은 마립간 시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마총 금관(天馬塚 金冠). 천마총 금제 허리띠(天馬塚 金製 銙帶) 및 천마총 목걸이(天馬塚 頸胸飾)

천마총 금관(天馬塚 金冠. 국보 제188호.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금관이다.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금관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높이 32.5㎝의 전형적인 신라 금관으로 묻힌 사람이 쓴 채로 발견되었다. 머리 위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는 山자형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2줄로 있는 형태이다. 山자형은 4단을 이루며 끝은 모두 꽃봉오리 모양으로 되어있다. 금관 전체에는 원형 금판과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리고 금판 장식을 촘촘히 연결하기도 하였다. 밑으로는 나뭇잎..

천마총(天馬塚)

천마총(天馬塚. 황남동 제155호 고분. 경북 경주시 황남동 262) 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 천마총은, 옆에 위치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발굴한 곳인데,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 같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되어 ‘천마총(天馬塚)’이 되었는데, 최근 이 천마가‘말’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 관식, 금 허리띠,..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 三層石塔 舍利莊嚴具)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 三層石塔 舍利莊嚴具. 보물 제366호.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는 경상북도 월성군 감은사터에 있는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가운데 서쪽에 있는 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3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이다. 사리를 모시기 위한 청동제사각함과 그 안에 있던 사리기로 구성되었다. 사리기를 넣었던 사리감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발견 당시 몹시 부식된 상태였다. 사각형의 상자의 윗면은 완만한 원뿔모양의 뚜껑이 있는 형태로, 전체 높이가 약 31㎝정도 된다. 사리함의 네 옆면에는 각각 사천왕상이 1구씩 별도로 주조되어 부착되었고, 그 양 옆에는 각각 동그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皇南大塚 北墳 琉璃盞) 및 유리琉璃 역사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皇南大塚 北墳 琉璃盞. 보물 제624호.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제 잔(배)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皇南大塚北墳 琉璃盞)은 높이 7㎝, 구연부 지름 10.5㎝로 북쪽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구연부 부분은 수평이 되도록 넓게 바깥쪽으로 벌어졌고, 몸통 부분은 밥 그릇 모양으로 밑이 약간 넓어진다. 아랫부분에는 우뚝한 받침이 있는데, 짧은 목을 거쳐서 나팔형의 굽이 달렸다. 유리는 투명한 양질이고 갈색으로 전체에 걸쳐 나뭇결 무늬가 있다. 받침 바닥에 약간의 손상이 있는 외에는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

한국 최고最古의 유리?

한국 최고最古의 유리? 부여 송국리유적 독널무덤甕棺墓에서 확인된 납 유리(납22% 이상 함유)인 상감유리象嵌琉璃와 보령 평라리유적 독널무덤甕棺墓에서 출토된 포타쉬potash(포타슘(potassium) 또는 칼륨(kalium)이라 불리는 원자번호 19번의 원소)유리인 유리구슬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리' 논쟁의 주인공입니다. 그 이유는 송국리유적에서 확인된 유리는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것이며, 평라리유적의 유리구슬은 매장주체부가 아닌 묘역墓域 부분에서 발견된 것이어서 청동기시대 유리구슬로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유리구슬 제작 시점을 고려해 볼 때 기원전 5세기 이전의 한반도에 유리구슬이 존재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주장으로는 청동기시대 후반부..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慶州 九十八號 南墳 琉璃甁 및 盞)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慶州 九十八號 南墳 琉璃甁 및 盞. 국보 제193호.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병 1점과 잔 3점의 유리제품이다. 이고, 잔① 높이 12.5㎝, 구연부 지름 10㎝ 잔② 높이 8㎝, 구연부 지름 10.5㎝ 잔③ 높이 10.5㎝, 구연부 지름 9.5㎝의 크기이다. 병은 연녹색을 띤 얇은 유리제품으로 타원형의 계란 모양이다. 물을 따르기 편하도록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좁게 오므렸다. 가느다란 목과 얇고 넓게 퍼진 나팔형 받침은 페르시아 계통의 용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목에는 10개의 가는 청색 줄이 있고, 구연부에는 약간 굵은 선을 돌렸으며, 손잡이에..

경주 동부사적지(첨성대 일원) 꽃밭단지 거닐다.

경주 동부사적지(첨성대 일원) 꽃밭단지 거닐다. 첨성대 일원의 동부사적지 꽃밭단지가 관광객들에게 추억의 관광코스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첨성대 :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 첨성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

전(傳) 염불사지 삼층석탑

전(傳) 염불사지 삼층석탑(사적 제311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30)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수많은 불교유적이 계곡마다 조성된 경주남산은 신라인들의 역사와 문화·신앙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는 영산으로써 2000년 12월 2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남산 봉구곡 자락 남산동 1130번지 일원에 위치한 전(傳) 염불사지에 대한 ‘삼국유사’에는 “한 스님이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 염불을 외우셨다. 법당에 앉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그 소리가 당시 서라벌 360방 17만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여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는데 스님이 돌아가니 그의 초상을 흙으로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고쳐 불렀다”고 기록되어..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慶州 南山洞 東·西 三層石塔)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慶州 南山洞 東·西 三層石塔. 보물 제124호. 경북 경주시 남산동 227-3번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이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탑은 전형적인 3층석탑의 양식이다. 동탑은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이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잘 다듬은 돌 여덟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기단부(基壇部)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塔身部)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돌 하나로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과 낙수면이 모전석탑처럼 똑같이 각각 5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2단의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

경주 서출지(慶州 書出池)

경주 서출지(慶州 書出池. 사적 제138호. 경북 경주시 남산1길 17 (남산동))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이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

화려한 색채의 향연, 경주의 여름꽃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 6월 중순부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8월 초중순까지 볼 수 있는 연꽃이 동궁과 월지 영역 바깥의 유휴지에 빼곡히 식재되었다. 꽃단지 사이를 거닐 수 있는 산책로가 잘 갖추어져 있고, 쉬어갈 수 있는 정자도 꽃단지 한 가운데 자리한다. 연꽃은 햇빛이 강해지면 꽃봉오리는 오므리는 습성이 있다.

경주 첨성대(慶州 瞻星臺)와 꽃단지

경주 첨성대(慶州 瞻星臺. 국보 제31호.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 첨성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경주 마동 삼층석탑(慶州 馬洞 三層石塔)

경주 마동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912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마동 화강석으로 만든 이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세워진 것으로 현재 상륜부의 노반 이상은 없어졌다. 기단부에는 위아래 모두 양우주와 탱주 2개를 양각하였으며, 하층 기단은 8매 석으로 되었으나 중석은 하대석과 한 돌로 만들었다. 갑석 역시 8매 석이며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은 삼층 모두 별석이며, 특히 옥개석에는 정교한 5단 받침을 갖추었다. 현재의 높이는 5.4m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과 인연이 있다고 하는데, 김대성이 무술을 닦을 때 큰곰을 잡아 운반하다가 날이 저물어 현재의 석탑이 있는 부근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에 곰이 덤벼들면서 절을 지어주지 않으면 해치겠다고 하..

경주 장항리 사지(慶州 獐項里 寺址)

경주 장항리 사지(慶州 獐項里 寺址. 사적 제45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1081번지) 토함산 동남쪽 계곡의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절터가 있는 계곡은 대종천의 상류로 감은사터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간다. 절을 지은 연대나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장항리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사지라 불러오고 있다. 절터에는 서탑인 5층석탑과 파괴된 동탑의 석재, 그리고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으로 보이는 건물터에 있는 석조불대좌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이 대좌 위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이는 석조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으며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서탑은 일제시대에 도..

고대 삼국시대 말 갑옷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 -

고대 삼국시대 말 갑옷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국립경주박물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공동기획 특별전 「말, 갑옷을 입다」 개최! 국립경주박물관(관장 민병찬)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는 2020년 6월 12일(금)부터 8월 23일(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말, 갑옷을 입다」 특별전을 공동 개최한다. 신라와 가야,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말 갑옷 그리고 고구려 고분 벽화 속 말 갑옷까지 고대 삼국의 말 갑옷 18점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1992년 함안 마갑총에서 나온 말 갑옷과 2009년 경주쪽샘지구 C10호의 말 갑옷을 비롯해, 경주 계림로 1호 등에서 조각 상태로 나온 6점, 말 투구 10점 등이 전시에 출품됐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경주 황..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 보물 제201호.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72, 산79)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사찰을 경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남쪽 바윗면에는 삼존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윗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을 표현해 놓았다. 불상·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기 다르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경주 남산 천룡사지(慶州 南山 天龍寺址)

경주 남산 천룡사지(慶州 南山 天龍寺址) 천룡사지가 있는 천룡계곡은 서남산의 제일 마지막 계곡 용장계곡의 다음 계곡이다. 그 정상을 통상 고위산이라고 한다, 천룡사라는 절은 신라 당시에는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하는 아주 존중받았던 곳이다. 그래서 석가만일도량을 열고 국토의 안위를 기원한 곳이 천룡사였다. 절이 천룡사라고 불리게 된 유래, 그리고 이곳을 중수하여 힘썼던 뜻있는 이들의 노력은 삼국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토론삼한집에 말하기를 "계림 땅에 딴 곳에서 흘러온 물의 두 근원이 천재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을 이룬다."고 하였다. 한번은 중국의 사신 악붕귀가 와서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고 했다. 옛날에 이름을 전하지 않는 시주에게 두 딸..

경주임란의사추모탑 - 문천회맹 -

배경음악 : 의병의 노래 경주 문천회맹(蚊川會盟) 경주읍성을 탈환하기 위한 문천회맹은 선조 25년(1592) 6월 9일 경주 남천(문천)가에 위치한 월성에서 있었다. 이 회맹은 팔공산, 화왕산 회맹보다 앞선 것으로 임란사에 길이 빛날 것으로 믿어진다. 통문(通文)을 받은 의병들은 문천회맹을 갖기 위해 모이기 시작한다. 당시의 관계기록이 대동소이하나 《동계실기》에 따르면 5월28일 이언춘은 동해안으로부터 월성으로 진지를 옮겼다. 이때 부윤 윤인함이 곧바로 달려와 격려하였다. 5월 28일 이계수 등 10여 의사가 문천에 온 것을 시작으로 6월 5일 이경연 등 11인은 울산에서, 정세아 등 14인은 영천에서, 김천빈 등 8인은 영일에서, 서방경, 서극인, 이대임은 장기에서, 정인수 등 11인은 흥해에서, 박희..

분황사(芬皇寺)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 사적 제548호.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경주 분황사지’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분황사’가 있던 곳으로,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분황사’는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었으며,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하였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경역 내·외부를 확인하였는데, 창건 당시 신라 최초의 품(品)자형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그 후 세 번의 중건을 거쳐 광해군 원년(1609)에 현재의 금당인 보광전을 조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 사찰에서 탑을 ..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慶州 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단석산 신선사 가는 길(경사가 급함) 대웅보전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慶州 斷石山 神仙寺) 신선사 마애불상군내에 있는 금석문에 의하면 신선사는 7세기경 잠주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확인된다. 김유신이 17세 때 신선사 석굴법당에서 기도 중 난승도인으로 부터 신검을 받아, 삼..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 충의당 忠義堂.용산서원龍山書院 답사 가다.

충의당(忠義堂.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9호.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3길 28-17 (이조리)) 대경상록자원봉사단(총단장 하종선) 영상반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충의당과 용산서원을 답사하였다. 최진립 장군은 1568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25세 나이로 의병으로 참전했고, 정유재란 때 결사대 100명과 함께 큰 공을 세워 전쟁이 끝난 후에도 훈련부정, 도총부도사, 공조참판, 경기‧공청(충청)‧황해 수군통어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이후 병자호란 당시엔 공주 영장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발발 후 69세의 노구를 끌고 청군과 싸우다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했다. 전사 1년 후 시신이 수습될 당시를 기록한 글에 따르면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