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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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보성리 암각화(永川甫城里巖刻畵)

영천 보성리 암각화(永川甫城里巖刻畵. 시도유형문화재 제286호 (영천시). 경북 영천시 청통면 보성리 666-2)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던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인다. 이 암각화는 거북이 모양으로 생긴 바위 한 쪽 옆면에 7개의 그림을 새겨 놓았다. 그림을 새긴 면의 넓이는 최대 길이 337㎝, 최대 폭 130㎝이다. 포항 칠전리와 고령 양전동, 영주 가흥리에 있는 암각화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문화유형으로 추정되나, 각 그림의 세부형식이 조금씩 달라, 서로 시대가 달랐거나 혹은 지역이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대를 정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청동기 후기나 철기시대 초기 단계의 것으..

경상북도/영천 2010.01.03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

목조문무인상(木造文武人像)과 경주왕룡사원목조아미타여래좌상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 현판 목조문무인상(木造文武人像.시도민속자료 제73호 (경주시).경북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149-1)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작품(後期作品)으로 보이는 이 문무인상은 홰나무 재질(材質)로 되어 있다. 두 개의 상은 모두 통나무에 ..

경주안계리석조석가여래좌상(慶州安溪里石造釋迦如來坐像)

경주 안계리 석조석가여래좌상(慶州安溪里石造釋迦如來坐像.문화재자료 제92호 (경주시).경북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 산8-4)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에 있는 화강암으로 만든 좌불상으로, 불상의 높이 150㎝, 어깨 폭 84㎝, 무릎 폭 120㎝이다. 얼굴은 원만한 인상이고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李公제碑및郡守李侯範善永世不忘碑)

이서공원 이공제비및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李公제碑및郡守李侯範善永世不忘碑.시도유형문화재 제23호 (수성구). 대구 수성구 상동 182. 이서공원 내) 규 모 : 건물(비각1칸 9.72㎡), 비석3기(이공제비2, 이후범선영세불망비1기) 이공제비는 이서(李 漵) 선생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대구 주민들이 세운 ..

대구 2009.12.16

광해군태실(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연경동 들판에서 본 태봉 광해군 태실(光海君 胎室.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654)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있는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의 태실. 태실(胎室)은 조선 왕실에서 자녀가 태어날 경우 아이의 태를 길한 곳에 묻던 곳을 말한다. 아이의 태를 소중히 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에 중요하다고 여겼고, 특히 왕실의 경우에는 국운과도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광해군왕 태실(光海君王 胎室)은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의 태실인데, 1609년에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에 조성된 가봉 태실(加捧胎室)이다. 가봉 태실이란, 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추가로 석물을 올려 치장한 태실을 말한다. 광해군왕 태실은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654에 있다. 연경동에는 태봉마을이 있는데, 마..

대구 2009.12.16

지산고택(芝山故宅)

이 건물은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문신(文臣)이며 학자(學者)이신 조호익(曺好益)(1545∼1609) 선생의 종택(宗宅)이다. 선생의 호(號)는 지산(芝山), 본관(本貫)은 창녕(昌寧),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硏究)하였고 명종(明宗) 15년(1560) 생원(生員), 진사(進士)를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나 선조 9년(1576) 경상도(慶尙道) 도사(都事) 최황(崔滉)의 무고(誣告)로 강동(江東)에 유배(流配)되어 배소(配所)에서 후진(後進)을 양성하여 관서부자(關西夫子)의 칭호(稱號)가 특사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배소에서 풀려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민(郡民)을 규합(糾合) 중화(中和)·상원(祥原) 등지에서 전공(戰功)을..

경상북도/영천 2009.12.09

공사 중인 월정교

월정교 월정교는 『삼국사기』경덕왕조에 '경덕왕 19년...2월...궁의 남쪽 문천상에 춘양월정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서 전하는 교량으로 판단되고 있다. 월정교는 남, 북편 교대와 4개소의 주형교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길이는 약 60.57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상면에 누각(樓閣)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월정교는 신라왕경 서쪽 지역의 주된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 신라왕경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발굴 중인 월정교 공사중인 월정교

이차돈 순교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1914년 백률사에서 박물관으로 이전.높이 104㎝, 각 면의 너비 29㎝) . 원래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의 백률사. 건립연대는 817년(헌덕왕 9)으로 추정 0. 네모난 대좌 위에 놓여진 6각기둥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위에는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0.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527년(신법흥왕 14) 이차돈이 불사(佛事)를 일으키다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는데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치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여 왕과 군신들이 마침내 불교를 공인했다는 내용이다. 아래쪽에는 땅을 상징하는 물결과 같은 무늬가 있고 그 위에 관을 쓴 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원차종성 변법계 철위유암 실개명(願此鍾聲 遍法界 鐵圍幽暗 實開明) 삼도이고 파도산 일체중생 성정각(三途離苦 破刀山 一切衆生 成正覺), 원컨데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무쇠 둘레 어둠에서 나와 다 밝아지소서. 삼악도의 고통을 여의고 칼산을 허물어 모든 중생이 정각을 이루게 하소서. 범종은 아침 예불 때는 33번을, 저녁 예불 때는 28번을 울린다. 33은 제석천이 다스리는 도리천 즉 33천까지 진리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의미이고, 28은 태양이 지나는 황도대에 있는 28개의 별자리를 뜻하며 28수는 밤이 되면 이 땅을 보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국보 제29호.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

명활산성(明活山城)

명활산성(明活山城.사적 제47호.경북 경주시 천군동, 보문동 )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진흥왕 때의 ‘명활산성작성비’가..